Thursday, March 17, 2011

할머니 편히 쉬세요.

  할머니...
  저 선희에요. 할머니의 첫 손주, 선희는 방금 할머니의 임종소식을 들었답니다.
전화를 끊고나서 저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지요.
할머니의 점점 약해져가는 건강소식은 목포에 계시는 아빠와 동생 민석이를 통해서 듣고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소식은 아니였지만, 막상 우리 할머니가 이 세상에 저희와 같이 계시지 않는 다는 사실에 감당하지 못할 아픔이 밀려왔답니다.
할머니의 마지막 목소리를 올 초 구정에 들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곤 생각치 않았어요. 할머니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제 귀에는 아직도 쟁쟁합니다.
  "선희야, 한국에 언제 안 오냐? 수린이는 건강히 잘 지내지?"

 벌써 한국을 다녀온지 1년 반이 지났습니다.
한국을 떠나기전 할머니와 했던 약속을 다시한번 꺼내어 봅니다.
   "선희야, 1년 뒤에 한국 또 와라."
이 손주는 그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할머니, 용서 하세요.

 자식은 부모 가까이서 사는 것이 효도의 원칙이라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있지만, 저는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야 말로 부모를 진정으로 기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항상 믿어왔고 또 그렇게 실천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 이 시간 만큼은 저 머나먼 땅에서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사는 제가 너무나도 밉고, 애통합니다. 할머니, 마지막 저 먼길 가시는 길에 직접 영정에 가서 절도 못하는 할머니의 첫 손주를 용서하셔요.
  할머니의 영혼이 이 세상을 뜨시기전에, 할머니 살아생전에 머물었던 모든 장소와 할머니와 인연을 맺었던 모든 이들을 한번씩 거쳐가신다면, 이 곳 시카고에서 한 맺힌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올리는 저, 선희를 어루만져주시고 가셔요.

  나의 할머니, 고선단 여사님은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표상이십니다. 겉으로 거창하게 표현을 나타내지 않으셨지만 마음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고, 자애로우셨습니다.
  나의 할머니, 고선단 여사님은 비록 가난한 농부의 아내로 생계를 어렵사리 꾸려나가셨지만, 그 어느 누구 못지 않게 7남매를 자랑스럽게 키워내셨습니다.
  나의 할머니, 그 분의 7남매를 향한 모성애는 당시 어린 제 눈과 귀에도 대단히 느껴졌습니다.

   할머니는 당신의 자녀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시골 벽지인 도초면에서부터 모든 열성과 투지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배우지 못한 한에 평생을 아파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씁쓸히 웃는 얼굴과 흰 것은 종이요, 검정 것은 글씨로다, 하는 말이 귀에 쟁쟁 합니다.
   또한, 할머니가 소중히 가지고 다니시던, 손 때가 닿을대로 닿은 가족들 전화기록부가 제 눈에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전화기록부 안에는 마치 어린아이가 쓴 것과 같은 가족들 이름과 전화번호가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었지요. 할머니의 가족사랑과 그들의 안부를 마음속으로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펼쳐 놓으시던 당신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이제 엄마가 된 제 눈에 할머니의 쉽게 굽히지 않은 끈기와 자식에 대한 열정은 너무나도 크게 보입니다. 자식을 향한 헌신적 사랑과 그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마치 자신이 겪는 것 처럼 가슴 아파하시던 나의 할머니.. 저는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비록 할머니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제가 다음에 한국을 방문하더라도 저는 할머니의 온기를 느낄 수 없겠지만, 제 기억속에 할머니는 굳게 자리잡고 계십니다.
   할머니를 떠 올리며 저는 제 아이를 사랑하겠습니다.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제 아이를 할머니의 자애롭고 끝없는 사랑으로 키우겠습니다. 이 길이야말로 제가 할머니를 평생 제 마음속에 기리는 길이 될 것이고, 이로 인해 할머니는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할머니, 부디 편안히 행복하게 쉬세요.


태평양 건너 미국땅, 시카고에서 
할머니의 첫 손녀딸, 윤선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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